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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35921  글쓴이 우리역사  조회 785  누리 92 (102,10, 16:7:1)  등록일 2011-6-20 15:45

진실된 역사를 보면 프랑스대혁명(1789년~), 제1차 세계대전 민족자결주의(1914년~)로 오늘날의 민족주의(?)적 국가와 세계가 성립, 완성되었다.

분명 초기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다른 얼굴이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자유주의의 대항마로 떠오른 사회주의, 모두 민족주의적 국가 생성 후 파생된 이념들이다.

이러한 사상들이 생성된 배경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다. 진정 인류의 진보를 원한 희생적 사상가와 자본의 하수인으로 복무한 위정자를 구분 판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튼 서구제국주의는 세계경영 전략의 수단으로 민족주의와 그에 파생되어 나온 여러 정치·경제 사상·이념들을 퍼뜨렸고, 이에 동반된 군력으로 신세계 질서를 완성했다.

그 구체적 결과들이 거대왕국 분쇄와 중앙집권적 왕정폐지, 공화제의 민족단위 국가 성립 유도로 나타났다.

분명 민족단위의 국가 성립은 제국주의의 불순한 의도에 의해 전략적으로 조장된 측면이 매우 크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사상·이념 자체가 나쁜 것인가?

제국주의 서세는 오손과 조선을 분쇄하여 민족주의 국가로 이행시켰고, 그 종지부를 찍기 위해 현대중국을 분쇄하려했지만 다른 변수에 의해 제동이 걸린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역사조작은 반드시 거쳐야할 요소였다. 이러하니 ‘역사 바로알기’는 ‘제국주의 바로알기’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역사복원’을 ‘영토복원’ 혹은 ‘종족통폐합’과 똑같은 시각에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서세의 세계경영 전략에 의해 일본이 ‘가해자’로 조선의 후예인 우리를 짓밟았고, 현대중국은 ‘가담자’로 그 일정의 몫을 거들었다. 결국 ‘피해자’는 우리다.

‘역사를 바로알자’며 수백년, 수천년 전의 역사를 챙겨가며, 이러한 역사를 간과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발상이다. 저 현대중국이나 일본이 어떻게 우리와 다같은 조선의 백성인가?

일본과 현대중국이 ‘가해자’와 ‘가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서세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과거가 자랑스럽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로인해 신세계 경영 질서에 호응하고 동조한 것 아니겠는가?

조선/한국의 독립을 외친 분들이 대륙 출신이건 반도 출신이건 중요하지 않고, 그 조선/한국 독립의 지분이 오늘날 코리아에 다 남겨졌으니, 옛 조선의 지분은 오롯이 우리 코리아가 다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거대왕국들은 민족주의 국가가 아니고 주류족속이 비주류족속을 이끄는 역사가 수천년간 반복된 셈이다. 그에 따라 당연히 신분계급이란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조선의 주류족속이 오늘날의 우리민족과 분명 관련이 있고 일본과 현대중국과는 관련이 적다. ‘가해자’와 ‘가담자’ 그리고 ‘피해자’의 역할 구도는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일본과 현대중국에 의해 희생된 한복입고 우리말 하던 대륙의 조선인 숫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러한 비교적 최근의 역사를 간과하고 또 인류의 역사 발전법칙을 무시하며, 다같이 대륙의 조선으로 회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새로운 제국주의이며, 다문화·잡탕 문화와 다를 것이 없다.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학문적 차원에서 접근할 문제지, 정치로 바로 환원할 문제는 아니다. 역사를 통해 진실을 확인하고 또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면 그 목적은 온전히 다 이룬 것이다.

의도와 동기야 어찌되었건 인류는 민족주의로 이행되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조선의 후예인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정신은 제국주의 경영 수단의 일환인 전략적 민족주의를 쳐부수고, 진정 수평적 관계의 참된 민족주의 국가 시대를 선도하는 것이지 또다른 제국주의를 잉태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주장하여 드넓은 고려-조선의 모든 영토를 완전히 수복하고자 한다면, 그 끝은 결국 큰 비극이 따를 것이다.

서세 제국주의 위정자들에 의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의 사상·이념들이 우리에게 전략적으로 침투된 면이 크지만, 그렇다고 이 사상·이념들 자체를 거부할 수도 없고 거부할 필요도 없다.

‘홍익인간’의 더 큰 이념으로 이러한 사상들의 좋은 점을 포용하고 제국주의 음모세력의 협잡을 더욱 강한 힘으로 짓누르기만 하면 전 인류는 진정 널리 이로워질 것이고, 과거와 같은 거대한 영토를 보유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인류의 등불’로 세계의 존경을 얻을 것이다.

서세의 제국주의 잡놈들과 쪽바리, 짱깨들을 단죄하고 대륙의 영토회복은 현재의 우리 겨레와 직결된 부분만 회복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진정 각 민족이 수평적으로 그 고유 문화와 풍습을 지켜가며, 서로를 존중하고 영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지속할 수 있는 세계를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주도하는 것이, 단군의 후예인 우리가 이뤄야 할 세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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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35773  글쓴이 우리역사  조회 1729  누리 209 (231,22, 35:18:5)  등록일 2011-6-18 05:56

임진왜란에 대해서 얘기하셨으니까 이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한문으로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원문들이 왜 일치하지 않을까요? 버젓이 ‘절강성’이란 단어가 언급되는 원문이 왜 존재할까요?

또 임진왜란시 선조가 북쪽으로 천도하지 않고 서쪽으로 천도했다는 원문은 왜 그리 많이 존재할까요?(한반도 전쟁이라면 서천하지 않고 반드시 북천해야 하지요. 서천하면 그 곳은 바다지요.)

또 임금의 명령을 적는 ‘교유서’라는 곳에서 선조는 왜 이순신 장군을 산서 사람이라 칭했을까요? 강단학계에서는 임진왜란을 한반도 남해의 동과 서에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했는데, 같은 원문에서 왜 선조는 조선의 북쪽이 아닌 서쪽에는 ‘전쟁의 화’를 입지 않았다고 말했을까요?

일제에 의해 교열을 거쳤던 거치지 않았던 현재의 사서에도 저러한 원문이 다수 존재하지 않습니까? 대륙의 흔적이 저토록 많이 발견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강단학계의 주장이 진실된 역사라면 이러한 논란 자체가 없는 것이 정상 아니겠습니까? 재야학인들이 어느 세력의 사주를 받아 이런 논란이 생겨난 것일까요? 일본이 역공작을 위해서 저러한 사서들을 교열하였던 것일까요?

보편적 강단학계에서 이러한 주장들을 신경이나 쓰고 있나요? 왜 이러한 원문에 대한 손쉬운 반박을 하지 않을까요? 시원하게 논란을 불식시켜 준다면 저같은 사람도 마음 편하게 신뢰할 것 같은데요.

심지어 강단학계에서 해석하여 편집해 놓은 서적 등에서도 한반도에 낙타가 출현하기도 하지요. 이것이 한반도에만 한정된 역사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이러한 사료가 현재 각종 국가고시에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님이 댓글로 주신 질문은 제가 며칠전 올린글 <조선에 복속되었던 일본의 역사> 말미에 추론해 적어 봤습니다. 물론 추론이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제 글을 다 읽지 않고 질문 하셨나 보군요.

그리고 어떤 놈들이 왜가 아닌 일본에게는 면죄부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던가요? 그거 미친놈들이네요. 임진왜란 때도 경술국치 때도 결과적으로 왜와 일본이 결합해서 조선을 침공한 것이고, 또 지금은 왜와 일본을 구분조차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런 것은 저의 글이나 주장과 하등의 관련이 없으니 상당히 불쾌한 질문이고 무례입니다.

저야 이전의 제 글에서 몇 번이나 말했지만, 원문해석이 가능한 학자가 아니니 강단학계와 재야학계의 해석과 해설을 둘 다 비교해 봤습니다. 이것이 일치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요. 또 강단학계의 보편적인 주장은 일제에 의해 추진된 ‘조선사편수회’에서 기인한 사관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 수십년 전과 현재의 역사 전공서나 교과서의 내용이 크게 변한게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조선왕조실록 원본을 왜 아직까지 쪽바리들이 보유하고 있을까요? 이와 함께 또 이놈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26만여권의 우리 사서를 보유하며 반환 못한다고 개기고 있을까요? 또 우리는 왜 ‘전주사고본’을 제외하고는 이 조선왕조실록을 사본 밖에 보유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쪽바리는 지난해부터 이러한 사서들을 구걸협상의 미끼로 이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요.

또 프랑스 놈들은 한세기 반이 지나고 국제정세가 심상치 않은 오늘날의 시점에 왜 조선왕실의궤 등의 우리 문화재를 반환한다며 구걸하고 있을까요?

더하여 짱깨들은 왜 이집트나 멕시코의 피라미드를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장안(서안)과 집안의 피라미드를 산으로 은둔시켜 두었어야 했을까요? 또 짱깨들 역시 오늘날의 국제정세에서 왜 그렇게 비굴한 모습을 거듭하고 있을까요.

어제 ‘고단한 시대’님 덕분에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지우셨지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란 조선의 지도 원본을 왜 쪽바리들이 보유하고 있고, 또 그 사본을 왜 쌩뚱맞게 말레이시아가 보유하고 있을까요? 왜 우리의 교수님으로 불리는 많은 사학자 분들은 이러한 현상을 바로 잡으려 노력하지 않을까요? - 저는 이전의 저의 글에서 말레이시아 역시 왜의 본거지라고 추론하였는데 참 흥미롭습니다.

님이 강단학계의 주장을 그대로 믿으시듯 저는 아주 당연히 이러한 현상들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답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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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고백

역사 2011/06/21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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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35701  글쓴이 우리역사  조회 2710  누리 160 (212,52, 40:22:8)  등록일 2011-6-17 08:27

최근 지구촌 여기저기서 학자니 전문가니 하는 이들에 의해 현대중국이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전문가 그룹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말하는 중국 붕괴설의 근거로는, 대부분 경제적 요인과 내치의 모순과 부패 등을 꼽지만 실제 현대중국이 붕괴한다면 그 원인은 필시 역사의 부재가 가장 큰 작용을 할 것이다.

역사가 없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겐 그 유명한 모택동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발언의 실천의지와 관철의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러하지 못했다.

역사가 있다면 일시적으로 국가가 붕괴해도 민족은 지속되고 독립의지도 고양될 것이지만, 현대중국의 역사는 현대사가 역사의 전부다. 고로 어떤 방향의 힘이나 세력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붕괴되든 간에, 현대중국의 붕괴는 일시적 붕괴나 함락이 아닌 영구적인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모택동이 총구를 강조한 것은 국제정치학의 원론적 입장을 대변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심각한 고민이기도 하다. 정통성 없는 국가, 정당성 없는 국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강한 무력이 그 무엇보다도 절실히 필요하다. 모택동은 강한 총구로 단지 이념전쟁에서만 이겨내려고 발버둥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은밀한 거래를 주선한 거대한 힘에게 강한 총구로서 완전한 독립을 이루려고 한 것이다.

즉 모택동이 말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제국주의는 종이 호랑이일 뿐이다.’라는 말의 진의는 솔직한 자기 다짐이며 자기 고백이라는 뜻이다.

위의 말들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19세기로 돌아가서 당시를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초엽부터 조선대륙에서는 남부 해안가를 위주로 이양선이 쉴새없이 출몰하고 카톨릭이 급속도록 전파되는 가운데 헌종이 즉위하고 안동김씨를 대신한 풍양조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실시되자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다.

영국은 비슷한 시기 조선대륙 동남부에 복속되어 있던 일본막부에 집중적으로 아편을 침투시키고 이에 대한 일본막부의 대응이 아편전쟁(1840~1842년)으로 발생한다. 일본막부가 패한 이 전쟁의 결과로 제국주의 국가와의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이 이뤄지고, 일본막부 광동성의 향항(홍콩)이 떨어져나가고 광동성 일대에는 영국인의 출입이 빈번해진다.

철종 재위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기인 1856년에는 영국 상선과 조선 관헌과의 분쟁이 다시 전쟁을 불러오니 이 사건이 애로호 사건인데,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군을 이뤄 조선의 북경과 천진을 침공하여 북경조약을 이끌어내고 조선 내 기독교 포교권을 공식적으로 획득한다. - 위의 두 역사를 청과 현대중국의 역사로 편입시켰지만 사실 조선의 역사일 것이다.

앞서 말한 아편전쟁의 분쟁이 시작된 광동성 지역, 복건성과 절강성의 일부 지역이 조선에 복속되어 있던 일본막부 지역인데, 이 일본막부 지역에서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의 영향력이 증대된데 이어 1853년에는 미국이 개항을 요구해온다.

조선에 충성하며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던 일본막부가 영·미 등의 서세가 부추긴 반막부 세력이 이들이 끌고온 동남아 섬의 왜에게 전복된 것이 명치유신(1853년∼1877년)으로 나타났다. 이어 조선에 반기를 든 반막부와 왜구의 결집이 서세의 괴뢰국 일본제국(1868년)으로 탄생된다.

1864년 고종 즉위 대원군 집정시, 조선은 기독교에 급속도로 물들고 있었는데 이에 민간에서는 동학이 창시되고, 관 위주로는 조선 남부지역에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난다. 이 병인박해를 구실로 동년 프랑스군이 조선을 침공하는 것이 병인양요로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의 안남 지역(인도차이나반도)이 프랑스에 병합된다.

1875년에는 서세의 부추김에 의해 조선에서 막 독립한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듬해에는 강화도 조약 체결을 요구해오니 조선은 굴복하고 만다.

1882년에는 조선의 서북방 중앙아시아 청의 제안에 의해 미국과의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게 되는데, 청이 미국과의 연대를 제안한 실질적 이유는 스스로를 러시아로부터 지켜내는데 조선을 이용한 것이다.

러시아는 이에 아랑곳 않고 남하하여 1885년 조·러 통상조약을 체결하는데,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하는 것에 위협을 느낀 영국이 조선의 영토를 불법 점령하는 거문도 사건이 발생한다. - 영국은 이 거문도 사건을 제외하고는 조선과의 관계에 있어서 제도권 역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역사를 조작하면서 영국과 조선과의 많은 관계를 은폐하거나 중국사로 옮겨 보낸 것이다.

1880년대 청은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키 위해 ‘조선책략’을 유포하고 미국을 끌어들이고 조선을 이용하지만, 결국엔 러시아에 등 떠밀려 청의 본영인 중앙아시아를 넘어 조선의 신강성과 내외몽골 주위까지 밀려들어 왔을 것이다.

1894년 조선에서의 이해관계 대립이 청과 일본의 전쟁으로 불거지는데, 이듬해인 1895년 일본은 청을 패퇴시킨다. 이때 청은 사실상 멸망하여 러시아에 병합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역사가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의 러시아에의 병합(1895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청·일 전쟁의 승리로 조선대륙 동남부에서 북진하여 조선의 중심지역까지 진출하였을 것이며, 그로인해 고종은 조선의 황도인 장안(서안)을 비우고 남경으로 천도 후 대한제국(1897년)으로의 국호변경을 받아들이는데, 일본은 북진한 그 곳에서 남하하던 러시아와 부딪혀 러·일 전쟁(1904~1905년)이 발발한다.

서세의 배후지원으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북삼성 일대와 코리아반도는 물론이며 조선대륙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는데, 이 시기 서세는 일본의 통제세력으로 또다른 괴뢰를 내세우는데 이것이 손문 중심의 중국혁명동맹회(1905년)로 나타났다. - 중국이란 말은 고대부터 대대로 동이의 황도나 전략적 요충지 등을 일렀는데, 반조선 세력에 의해 이 시기 처음으로 국가명으로 떨어져 나왔을 것이다.

1907년 남경 경운궁에서 고종이 강제퇴위 되고, 1910년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로 공식 소멸되어 조선의 성소인 코리아반도로 넘어온다. 이어서 1911년 중국혁명동맹회의 손문 등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1912년 남경에서 중화민국임시정부를 세우고, 1927년에는 남경이 중화민국의 공식적 수도가 된다.

서세는 러·일 전쟁을 전후하여 일본과 영·일 동맹(1902년·1905년)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을 체결하여 대륙의 일시적 지배권을 위탁하기로 하고, 배후 지원·조종을 했기에 조선대륙은 사실상 일본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또한 서세는 그 통제변수로 중화민국을 지원했기에 중화민국은 그 나름대로 대륙에서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을 것이다.

대한제국 멸망 후 중화민국이 성립된 이 시기의 조선대륙은, 그러니까 왜와 결합한 대륙 동남부 출신 일본의 영향력이 가장 큰 가운데, 대륙 서남방 출신들로 여겨지는 중화민국이 양자강이남 지역에서 제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한국독립군이 섬서성 이동 일대를 종단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니 세 부류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었던 셈이다.

중화민국의 성립 초기 손문은 일본에 망명(?)해 중화혁명당(1914년)을 결성하는 등 일본과 크게 대립하지 않는데, 이것은 당시까지 일본과 서세의 관계가 원만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한편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사회주의 이념이 대륙으로 넘어오고, 중화민국의 내부에 이념 분쟁이 일게 되자 손문은 1919년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조한 후 공산주의자를 끌어안는데, 그 결과를 제1차 국공합작(1924~1927년)으로 명명하고 있다.

제1차 국공합작의 의의를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여 국민혁명(북벌)을 펼쳐 대륙의 모든 중국(?)인들을 중화민국의 깃발 아래 통일하자는 것이라고 제도권 역사에서는 설명하고 있는데, 진실은 신생 괴뢰국 중화민국의 양자강 이북으로의 영토확장과 북부지역에 여전히 남아있는 조선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이었을 것이리라.

1925년 손문 사후 중화민국의 실세로 장개석이 떠오르고 이내 곧 상해쿠데타(1927년)를 일으켜 중국공산당을 탄압한다. 이 탄압에 서세도 직접 가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음은, 중화민국 내의 국·공 분열시 서세는 자신의 이념성과 부합하는 중국국민당을 더 선호한 것이라 여겨진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킴에도 장개석은 “내정을 안정시키는 것이 외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우선한다.”는 발언을 하며 사실상 일본에 저항하지 않는다. 이 발언을 유추해 보면, 서세는 중화민국을 지원하는 동시에 여전히 일본을 지지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1930년대 들어 국민당 장개석 세력은 일본보다 오히려 공산당 세력과 지속적으로 대립하다가,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제2차 국·공합작(1937년)으로 일본에 저항한다.

일본이 중화민국을 침공한 이 사건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과 중화민국 양자 모두 서세의 지원을 받아 대륙의 조선을 지우는 사냥개들로 볼 수 있는데, 일본이 이 사냥개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려한 것이고, 서세는 그 통제변수로 중화민국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30년대 조선/한국독립군은 망국 후 일본과 중화민국의 대륙 점령으로 장개석에게 “중국 전체가 조선인의 역사 무대요.”라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조선의 실체를 다 알지는 못했기에, 중화민국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거대한 힘의 실체를 알 리가 없었을테고 우선 시급한 일본에 저항하고자 중화민국의 국·공과 연대하여 무장 항일투쟁을 벌여나간다.

1937년 시작된 중·일 전쟁에서 일본이 예측보다 잘 버텨내니, 서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개전하고 이에 대응하여 일본은 전선을 동남아시아와 태평양까지 확대하며 대응한다.

일본은 이 시기 자신들의 전통적인 근거지인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섬에서 영국군과 네덜란드군 등 과거 자신들의 주인들을 몰아내더니, 파죽지세로 인도차이나반도에까지 들어와 1942년 동조영기는 대동아공영권을 선언한다.

서세는 대전 초기 이렇게 강경하게 저항하는 사냥개 일본으로 인해 곤혹을 치르지만, 미국의 참전으로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갈아엎고 일본을 궁지로 몰아넣은 뒤 영·미는 자신들의 사냥개의 다른 한 축인 중화민국을 데리고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을 발표하며 일본의 처리문제를 제시한다.

또 이 회담 선언 후 동년 8월에는 차르에서 소비에트로 옷을 갈아입었던 러시아 역시, 얄타회담(1945년 2월)에서의 약속에 따라 유럽전선의 마무리에 이어 대일선전포고를 하며 신세계 질서에 호응한다.

1945년 8월 일본이 굴복하고 이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니 제2차 세계대전은 마무리되고 동시에 1937년 시작된 중·일 전쟁도 중화민국의 승리로 귀결된다. 서세가 주도하는 신세계 질서에 의해 중화민국이 대륙을 차지하게 되고 일본은 대륙과 동남아시아 섬 등에서의 모든 근거지를 잃고 일본열도만을 지킬 수 있었다.

대륙의 조선/한국독립군 역시 이 거대한 신세계 질서의 힘에 의해 대륙 영토수복에 실패하고 코리아반도로 귀환(?)하여 두 개의 코리아로 분열되고 만다. 상해 임시정부의 이동경로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대륙영토 수복의지를 확인 할 수 있는데, 임정은 1919년 상해, 1932년 항주, 1937년 남경·한구·장사·형양·광주, 1938년 유주, 1939년 귀양, 1940년 중경 등으로 이동한다. 이 이동 경로를 볼때, 임정은 광복이 가까워올수록 오히려 코리아반도의 반대 방향인 내륙의 깊숙한 곳으로 서진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듯 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세계의 흐름은 이념전쟁으로 재편되었고 그 큰 흐름의 연장선으로 서세가 안겨준 중화민국 내부에서도 1946년 국·공 내전이 발발한다. 초기에는 국민당이 우세하였으나 1949년 공산당이 국민당을 패퇴시키며,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하고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낸다.

1949년 공산당은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겨서 정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국가주석으로 모택동을 옹립한다. 이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사는 독립과 투항의 역사다.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서세로부터 독립시켜야 했다.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서세는 현대중국이라는 신생국가를 짱깨들에게 선물한 것이니 모택동은 과거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사냥개로서의 운명을 거부할 필요가 있었고, 이념전쟁의 구도를 빌려 독립을 꾀한 것이 소비에트 러시아와 수호동맹(1950년)으로 나타난다.

표면적으로 모택동 초기의 중화인민공화국은 평화·반패권·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자주외교를 내세웠지만, 이것은 이념전쟁의 노선을 빌린 서세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한 하나의 방법론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적 접근에 의해 반서방·반미·친소 정책을 추구한 것인데, 1960년대 들어 소비에트 러시아의 대국주의를 목격하게 되니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의 필용성을 느끼게 되는데, 이 결과물들이 핵무기 보유와 1968년 중·소 국경분쟁으로 표면적으로 드러났다.

그 사이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 내부의 저항에 의해 사임과 복권을 거듭하다 1970년 다시 최고지도자 위치에 오른다. 1970년대 들어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방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미국과 일본과의 교류가 시작된다.

모택동은 역사와 정통성이 없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서세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소련과 손을 잡고, 다시 소련에게서 독립하려고 서방과 협력하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노선 추구는 대륙에서 조선을 지우고 서세의 괴뢰로서 출발한 현대중국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1976년 모택동 사후 중화인민공화국 내부에서는 문혁파 4인방과 화국봉 세력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고, 화국봉은 문혁파 4인방을 반동세력으로 몰아 축출하는데 성공하여 1977년 최고지도자에 오르지만, 이내 곧 등소평 세력에의 저항을 받고 긴 권력투쟁에 돌입한다. 1981년 결국 등소평이 승리하여 화국봉을 숙청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가 된 뒤 실용주의적 개혁을 추구한다.

화국봉과 등소평의 권력투쟁이 한창이던 시절인 1978년에는 일본과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였고, 1979년에는 미국과의 국교수립과 관계정상화가 이뤄지는 등 서방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등소평 시대인 1980년대에는 여러 개혁조치로 인해 경제가 급성장했는데 1980년대 말엽에는 보다 더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추구하게 되고, 고르바초프의 소비에트 러시아와도 관계개선(1989년)을 착수한다.

등소평에 이어 1990년 강택민이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에 오르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 등 서세와 중화인민공화국 내 인권문제로 대립하다가 갈등을 해소하였고, 또 티베트 등의 분리독립 문제로 갈등과 갈등해소를 거듭하기 일쑤였고, 그 와중인 2001년 코리아에 대해서 동북공정을 단행한다.

이렇게 현대중국의 현대사는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독립과 투항의 역사가 반복된 것이다. 서세의 괴뢰로 출발한 역사적 정통성이 없는 현대중국을 독립시키려한 모택동,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며 핵무장을 하고서 외교적으로는 소련과 서세의 양자사이에서 실리와 독립을 모색하였으나 그 한계가 엿보인 것이, 등소평 시대에 와서는 서세에게 대문을 열어젖히며 완전한 독립의 의지는 꺾은 것이며, 그 대가로 표면적인 경제성장을 동반하였다.

강택민 시대 이후 현대중국의 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가파른 성장을 보이지만, 인권문제 제기와 티베트, 위구르 분리독립 문제 등 냉전시대의 이념전쟁과는 또다른 수세적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이러한 상황의 연장선에서 코리아에 대해서 동북공정을 실시한다. 현대중국은 태생자체가 이렇게 서세와 코리아 양자 모두의 적일 수밖에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총구의 한계가 엿보였을 때부터 그들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 것이었다. 사냥개로서의 예정된 운명을 맞든지 아니면 자신들에게 수천년간의 역사를 모조리 빼앗기고서도 다시 일어설 코리아에 의해서 그보다 더한 운명을 맞든지, 어떤 방향이든 그들의 미래는 불분명한 것이다.

모택동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발언의 진의와 동북공정 단행의 진실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모택동의 명언은 사실 현대중국의 생존 방법론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었던 것이다.

간도 혹은 현재 동북삼성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땅은 고토가 될 수가 없다. 불과 100여년 전까지 대륙 전체가 근대조선의 땅이었는데, 그 조선의 동북지역이 어찌 고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Posted by sat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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