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구촌 여기저기서 학자니 전문가니 하는 이들에 의해 현대중국이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전문가 그룹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말하는 중국 붕괴설의 근거로는, 대부분 경제적 요인과 내치의 모순과 부패 등을 꼽지만 실제 현대중국이 붕괴한다면 그 원인은 필시 역사의 부재가 가장 큰 작용을 할 것이다.
역사가 없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겐 그 유명한 모택동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발언의 실천의지와 관철의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러하지 못했다.
역사가 있다면 일시적으로 국가가 붕괴해도 민족은 지속되고 독립의지도 고양될 것이지만, 현대중국의 역사는 현대사가 역사의 전부다. 고로 어떤 방향의 힘이나 세력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붕괴되든 간에, 현대중국의 붕괴는 일시적 붕괴나 함락이 아닌 영구적인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모택동이 총구를 강조한 것은 국제정치학의 원론적 입장을 대변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심각한 고민이기도 하다. 정통성 없는 국가, 정당성 없는 국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강한 무력이 그 무엇보다도 절실히 필요하다. 모택동은 강한 총구로 단지 이념전쟁에서만 이겨내려고 발버둥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은밀한 거래를 주선한 거대한 힘에게 강한 총구로서 완전한 독립을 이루려고 한 것이다.
즉 모택동이 말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제국주의는 종이 호랑이일 뿐이다.’라는 말의 진의는 솔직한 자기 다짐이며 자기 고백이라는 뜻이다.
위의 말들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19세기로 돌아가서 당시를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초엽부터 조선대륙에서는 남부 해안가를 위주로 이양선이 쉴새없이 출몰하고 카톨릭이 급속도록 전파되는 가운데 헌종이 즉위하고 안동김씨를 대신한 풍양조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실시되자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다.
영국은 비슷한 시기 조선대륙 동남부에 복속되어 있던 일본막부에 집중적으로 아편을 침투시키고 이에 대한 일본막부의 대응이 아편전쟁(1840~1842년)으로 발생한다. 일본막부가 패한 이 전쟁의 결과로 제국주의 국가와의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이 이뤄지고, 일본막부 광동성의 향항(홍콩)이 떨어져나가고 광동성 일대에는 영국인의 출입이 빈번해진다.
철종 재위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기인 1856년에는 영국 상선과 조선 관헌과의 분쟁이 다시 전쟁을 불러오니 이 사건이 애로호 사건인데,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군을 이뤄 조선의 북경과 천진을 침공하여 북경조약을 이끌어내고 조선 내 기독교 포교권을 공식적으로 획득한다. - 위의 두 역사를 청과 현대중국의 역사로 편입시켰지만 사실 조선의 역사일 것이다.
앞서 말한 아편전쟁의 분쟁이 시작된 광동성 지역, 복건성과 절강성의 일부 지역이 조선에 복속되어 있던 일본막부 지역인데, 이 일본막부 지역에서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의 영향력이 증대된데 이어 1853년에는 미국이 개항을 요구해온다.
조선에 충성하며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던 일본막부가 영·미 등의 서세가 부추긴 반막부 세력이 이들이 끌고온 동남아 섬의 왜에게 전복된 것이 명치유신(1853년∼1877년)으로 나타났다. 이어 조선에 반기를 든 반막부와 왜구의 결집이 서세의 괴뢰국 일본제국(1868년)으로 탄생된다.
1864년 고종 즉위 대원군 집정시, 조선은 기독교에 급속도로 물들고 있었는데 이에 민간에서는 동학이 창시되고, 관 위주로는 조선 남부지역에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난다. 이 병인박해를 구실로 동년 프랑스군이 조선을 침공하는 것이 병인양요로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의 안남 지역(인도차이나반도)이 프랑스에 병합된다.
1875년에는 서세의 부추김에 의해 조선에서 막 독립한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듬해에는 강화도 조약 체결을 요구해오니 조선은 굴복하고 만다.
1882년에는 조선의 서북방 중앙아시아 청의 제안에 의해 미국과의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게 되는데, 청이 미국과의 연대를 제안한 실질적 이유는 스스로를 러시아로부터 지켜내는데 조선을 이용한 것이다.
러시아는 이에 아랑곳 않고 남하하여 1885년 조·러 통상조약을 체결하는데,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하는 것에 위협을 느낀 영국이 조선의 영토를 불법 점령하는 거문도 사건이 발생한다. - 영국은 이 거문도 사건을 제외하고는 조선과의 관계에 있어서 제도권 역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역사를 조작하면서 영국과 조선과의 많은 관계를 은폐하거나 중국사로 옮겨 보낸 것이다.
1880년대 청은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키 위해 ‘조선책략’을 유포하고 미국을 끌어들이고 조선을 이용하지만, 결국엔 러시아에 등 떠밀려 청의 본영인 중앙아시아를 넘어 조선의 신강성과 내외몽골 주위까지 밀려들어 왔을 것이다.
1894년 조선에서의 이해관계 대립이 청과 일본의 전쟁으로 불거지는데, 이듬해인 1895년 일본은 청을 패퇴시킨다. 이때 청은 사실상 멸망하여 러시아에 병합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역사가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의 러시아에의 병합(1895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청·일 전쟁의 승리로 조선대륙 동남부에서 북진하여 조선의 중심지역까지 진출하였을 것이며, 그로인해 고종은 조선의 황도인 장안(서안)을 비우고 남경으로 천도 후 대한제국(1897년)으로의 국호변경을 받아들이는데, 일본은 북진한 그 곳에서 남하하던 러시아와 부딪혀 러·일 전쟁(1904~1905년)이 발발한다.
서세의 배후지원으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북삼성 일대와 코리아반도는 물론이며 조선대륙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는데, 이 시기 서세는 일본의 통제세력으로 또다른 괴뢰를 내세우는데 이것이 손문 중심의 중국혁명동맹회(1905년)로 나타났다. - 중국이란 말은 고대부터 대대로 동이의 황도나 전략적 요충지 등을 일렀는데, 반조선 세력에 의해 이 시기 처음으로 국가명으로 떨어져 나왔을 것이다.
1907년 남경 경운궁에서 고종이 강제퇴위 되고, 1910년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로 공식 소멸되어 조선의 성소인 코리아반도로 넘어온다. 이어서 1911년 중국혁명동맹회의 손문 등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1912년 남경에서 중화민국임시정부를 세우고, 1927년에는 남경이 중화민국의 공식적 수도가 된다.
서세는 러·일 전쟁을 전후하여 일본과 영·일 동맹(1902년·1905년)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을 체결하여 대륙의 일시적 지배권을 위탁하기로 하고, 배후 지원·조종을 했기에 조선대륙은 사실상 일본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또한 서세는 그 통제변수로 중화민국을 지원했기에 중화민국은 그 나름대로 대륙에서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을 것이다.
대한제국 멸망 후 중화민국이 성립된 이 시기의 조선대륙은, 그러니까 왜와 결합한 대륙 동남부 출신 일본의 영향력이 가장 큰 가운데, 대륙 서남방 출신들로 여겨지는 중화민국이 양자강이남 지역에서 제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한국독립군이 섬서성 이동 일대를 종단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니 세 부류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었던 셈이다.
중화민국의 성립 초기 손문은 일본에 망명(?)해 중화혁명당(1914년)을 결성하는 등 일본과 크게 대립하지 않는데, 이것은 당시까지 일본과 서세의 관계가 원만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한편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사회주의 이념이 대륙으로 넘어오고, 중화민국의 내부에 이념 분쟁이 일게 되자 손문은 1919년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조한 후 공산주의자를 끌어안는데, 그 결과를 제1차 국공합작(1924~1927년)으로 명명하고 있다.
제1차 국공합작의 의의를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여 국민혁명(북벌)을 펼쳐 대륙의 모든 중국(?)인들을 중화민국의 깃발 아래 통일하자는 것이라고 제도권 역사에서는 설명하고 있는데, 진실은 신생 괴뢰국 중화민국의 양자강 이북으로의 영토확장과 북부지역에 여전히 남아있는 조선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이었을 것이리라.
1925년 손문 사후 중화민국의 실세로 장개석이 떠오르고 이내 곧 상해쿠데타(1927년)를 일으켜 중국공산당을 탄압한다. 이 탄압에 서세도 직접 가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음은, 중화민국 내의 국·공 분열시 서세는 자신의 이념성과 부합하는 중국국민당을 더 선호한 것이라 여겨진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킴에도 장개석은 “내정을 안정시키는 것이 외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우선한다.”는 발언을 하며 사실상 일본에 저항하지 않는다. 이 발언을 유추해 보면, 서세는 중화민국을 지원하는 동시에 여전히 일본을 지지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1930년대 들어 국민당 장개석 세력은 일본보다 오히려 공산당 세력과 지속적으로 대립하다가,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제2차 국·공합작(1937년)으로 일본에 저항한다.
일본이 중화민국을 침공한 이 사건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과 중화민국 양자 모두 서세의 지원을 받아 대륙의 조선을 지우는 사냥개들로 볼 수 있는데, 일본이 이 사냥개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려한 것이고, 서세는 그 통제변수로 중화민국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30년대 조선/한국독립군은 망국 후 일본과 중화민국의 대륙 점령으로 장개석에게 “중국 전체가 조선인의 역사 무대요.”라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조선의 실체를 다 알지는 못했기에, 중화민국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거대한 힘의 실체를 알 리가 없었을테고 우선 시급한 일본에 저항하고자 중화민국의 국·공과 연대하여 무장 항일투쟁을 벌여나간다.
1937년 시작된 중·일 전쟁에서 일본이 예측보다 잘 버텨내니, 서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개전하고 이에 대응하여 일본은 전선을 동남아시아와 태평양까지 확대하며 대응한다.
일본은 이 시기 자신들의 전통적인 근거지인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섬에서 영국군과 네덜란드군 등 과거 자신들의 주인들을 몰아내더니, 파죽지세로 인도차이나반도에까지 들어와 1942년 동조영기는 대동아공영권을 선언한다.
서세는 대전 초기 이렇게 강경하게 저항하는 사냥개 일본으로 인해 곤혹을 치르지만, 미국의 참전으로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갈아엎고 일본을 궁지로 몰아넣은 뒤 영·미는 자신들의 사냥개의 다른 한 축인 중화민국을 데리고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을 발표하며 일본의 처리문제를 제시한다.
또 이 회담 선언 후 동년 8월에는 차르에서 소비에트로 옷을 갈아입었던 러시아 역시, 얄타회담(1945년 2월)에서의 약속에 따라 유럽전선의 마무리에 이어 대일선전포고를 하며 신세계 질서에 호응한다.
1945년 8월 일본이 굴복하고 이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니 제2차 세계대전은 마무리되고 동시에 1937년 시작된 중·일 전쟁도 중화민국의 승리로 귀결된다. 서세가 주도하는 신세계 질서에 의해 중화민국이 대륙을 차지하게 되고 일본은 대륙과 동남아시아 섬 등에서의 모든 근거지를 잃고 일본열도만을 지킬 수 있었다.
대륙의 조선/한국독립군 역시 이 거대한 신세계 질서의 힘에 의해 대륙 영토수복에 실패하고 코리아반도로 귀환(?)하여 두 개의 코리아로 분열되고 만다. 상해 임시정부의 이동경로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대륙영토 수복의지를 확인 할 수 있는데, 임정은 1919년 상해, 1932년 항주, 1937년 남경·한구·장사·형양·광주, 1938년 유주, 1939년 귀양, 1940년 중경 등으로 이동한다. 이 이동 경로를 볼때, 임정은 광복이 가까워올수록 오히려 코리아반도의 반대 방향인 내륙의 깊숙한 곳으로 서진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듯 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세계의 흐름은 이념전쟁으로 재편되었고 그 큰 흐름의 연장선으로 서세가 안겨준 중화민국 내부에서도 1946년 국·공 내전이 발발한다. 초기에는 국민당이 우세하였으나 1949년 공산당이 국민당을 패퇴시키며,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하고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낸다.
1949년 공산당은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겨서 정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국가주석으로 모택동을 옹립한다. 이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사는 독립과 투항의 역사다.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서세로부터 독립시켜야 했다.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서세는 현대중국이라는 신생국가를 짱깨들에게 선물한 것이니 모택동은 과거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사냥개로서의 운명을 거부할 필요가 있었고, 이념전쟁의 구도를 빌려 독립을 꾀한 것이 소비에트 러시아와 수호동맹(1950년)으로 나타난다.
표면적으로 모택동 초기의 중화인민공화국은 평화·반패권·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자주외교를 내세웠지만, 이것은 이념전쟁의 노선을 빌린 서세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한 하나의 방법론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적 접근에 의해 반서방·반미·친소 정책을 추구한 것인데, 1960년대 들어 소비에트 러시아의 대국주의를 목격하게 되니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의 필용성을 느끼게 되는데, 이 결과물들이 핵무기 보유와 1968년 중·소 국경분쟁으로 표면적으로 드러났다.
그 사이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 내부의 저항에 의해 사임과 복권을 거듭하다 1970년 다시 최고지도자 위치에 오른다. 1970년대 들어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방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미국과 일본과의 교류가 시작된다.
모택동은 역사와 정통성이 없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서세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소련과 손을 잡고, 다시 소련에게서 독립하려고 서방과 협력하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노선 추구는 대륙에서 조선을 지우고 서세의 괴뢰로서 출발한 현대중국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1976년 모택동 사후 중화인민공화국 내부에서는 문혁파 4인방과 화국봉 세력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고, 화국봉은 문혁파 4인방을 반동세력으로 몰아 축출하는데 성공하여 1977년 최고지도자에 오르지만, 이내 곧 등소평 세력에의 저항을 받고 긴 권력투쟁에 돌입한다. 1981년 결국 등소평이 승리하여 화국봉을 숙청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가 된 뒤 실용주의적 개혁을 추구한다.
화국봉과 등소평의 권력투쟁이 한창이던 시절인 1978년에는 일본과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였고, 1979년에는 미국과의 국교수립과 관계정상화가 이뤄지는 등 서방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등소평 시대인 1980년대에는 여러 개혁조치로 인해 경제가 급성장했는데 1980년대 말엽에는 보다 더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추구하게 되고, 고르바초프의 소비에트 러시아와도 관계개선(1989년)을 착수한다.
등소평에 이어 1990년 강택민이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에 오르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 등 서세와 중화인민공화국 내 인권문제로 대립하다가 갈등을 해소하였고, 또 티베트 등의 분리독립 문제로 갈등과 갈등해소를 거듭하기 일쑤였고, 그 와중인 2001년 코리아에 대해서 동북공정을 단행한다.
이렇게 현대중국의 현대사는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독립과 투항의 역사가 반복된 것이다. 서세의 괴뢰로 출발한 역사적 정통성이 없는 현대중국을 독립시키려한 모택동,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며 핵무장을 하고서 외교적으로는 소련과 서세의 양자사이에서 실리와 독립을 모색하였으나 그 한계가 엿보인 것이, 등소평 시대에 와서는 서세에게 대문을 열어젖히며 완전한 독립의 의지는 꺾은 것이며, 그 대가로 표면적인 경제성장을 동반하였다.
강택민 시대 이후 현대중국의 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가파른 성장을 보이지만, 인권문제 제기와 티베트, 위구르 분리독립 문제 등 냉전시대의 이념전쟁과는 또다른 수세적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이러한 상황의 연장선에서 코리아에 대해서 동북공정을 실시한다. 현대중국은 태생자체가 이렇게 서세와 코리아 양자 모두의 적일 수밖에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총구의 한계가 엿보였을 때부터 그들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 것이었다. 사냥개로서의 예정된 운명을 맞든지 아니면 자신들에게 수천년간의 역사를 모조리 빼앗기고서도 다시 일어설 코리아에 의해서 그보다 더한 운명을 맞든지, 어떤 방향이든 그들의 미래는 불분명한 것이다.
모택동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발언의 진의와 동북공정 단행의 진실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모택동의 명언은 사실 현대중국의 생존 방법론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었던 것이다.
간도 혹은 현재 동북삼성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땅은 고토가 될 수가 없다. 불과 100여년 전까지 대륙 전체가 근대조선의 땅이었는데, 그 조선의 동북지역이 어찌 고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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